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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안내

통구리

통구리

본래 적성현 북면 지역으로 마을 입구를 나서야만 임진강변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과 통한다 하여 『적성읍지』에는 ‘통구리[通溝]' 또는 ‘통기'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 하신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다. 오랫동안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1개의 행정리에 1개의 반이 설치되어 있다.

지명유래

  • 맹골[孟洞] : 만가대산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 숯가마골 : 쑥골 남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남양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 쑥골[蓬洞] : 배나무골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쑥이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김해 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 요옥골[要玉洞] : 장승백이 북쪽에 있던 마을.
  • 우묵골 : 통기에 있던 마을. 지형이 우묵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원봉동(元峰洞) : 신선봉 남쪽에 있던 마을. 신선봉을 ‘원봉(元峰)'이라고도 하는데, 그 아래의 마을이라 해서 원봉동이라고 한다.
  • 통기[通口, 通溝] : 신선봉 서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여양 진씨(驪陽陳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지역명칭 설명

  • 가는골 : 우묵골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 가마작골 : 숯가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재골'이라고도 한다.
  • 까치골 : 가는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까치골 : 맹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닥다리 : 배나무골 뒤에 있는 골짜기.
  • 당골[堂谷] : 샛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 독고개[道峴] : 가마작골에서 노곡리의 덕골로 넘어가는 고개.
  • 뒷골 : 일대울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만가대산(萬家垈山) : 통구리와 두일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12m.
  • 맹골고개[孟洞峴], 화투골고개 : 통기에서 맹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 무령터고개 : 일대울에서 무령터로 넘어다니던 고개.
  • 무령터 : 만가대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무정터'라고도 불린다.
  • 배나무골 : 가마작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샛골 : 황새논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 소루터 : 맹골과 무령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신선봉(神仙峰) : 통기 동쪽, 노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높이 134m. 예전에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한다.
  • 쑥골고개[蓬峴] : 앞세울에서 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 앞세울 : 요옥골 북쪽, 통기 입구에 있는 골짜기.
  • 왕박골 : 통기 동쪽, 신선봉에 딸린 골짜기.
  • 요골모탱이 : 장승백이 북쪽, 요옥골 입구에 있는 길모퉁이.
  • 원봉이고개[元峰峴] : 통기의 가는골에서 원봉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 일대울[一垈谷] : 황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작지골 : 닥다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장고개[場峴] : 일대울에서 두일장거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장승백이 : 숯가마골 서쪽, 349번 지방도 옆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 장승이 서 있어서 장승백이라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까지도 목장승과 주막집이 있었다.
  • 장푸물 : 통기에 있는 내. 겨울에도 빨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많았다고 한다.
  • 절터골 : 신선봉 남쪽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전해 오나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약물터만 있다.
  • 조산고개[造山峴] : 원봉에서 노곡리의 조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 터골 : 일대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할미골 : 신선봉 서쪽에 딸린 작은 골짜기. 할미꽃이 많이 자생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황새논 : 통기 마을 입구에 있는 약 1,000평 넓이의 논. 예전에 황새가 많이 앉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효자문자리[孝子門址] : 통기 마을 중앙에 있던 진구주(陳九疇)의 효자문. 진구주의 자는 윤서(倫敍), 본관은 여양(驪陽)으로 통구리에서 태어났다. 진구주는 병자호란 당시 피난중에 청군을 만나자 아버지와 처자식을 숨기고 미처 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조정에서 그의 가족이 사는 이 곳에 효자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