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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안내

옥계리

옥계리

본래 연천현 남면 지역으로 옥녀봉 밑에 옥같이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옥계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전리를 병합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3개의 행정리, 17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유래

  • 개암밭골[榛田里] : 아전비 남쪽에 있던 마을. 옛날에 개암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관말[官村] : 중간말 북쪽에 있던 마을. 고려 말 연주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은 와편이 발견된다.
  • 독짓골, 탁거리 : 장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골짜기에서 옹기를 구웠다 하여 독짓골이 되었다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한 고려 때에는 이 곳에 있던 주막에서 막걸리를 팔았다 하여 ‘탁거리'로도 불린다.
  • 미래 : 연천아전비 북쪽에 있는 마을. 궁예가 세운 태봉국이 철원에 있었을 때 이 곳까지 조수가 들어와 수운을 이용하려 했으나, 전방에 조그만 언덕이 가로막혀 있어 통행이 어려웠다. 이때 여러 명이 힘을 모아 배를 밀며 언덕을 넘어다녔다 하여 ‘밀어고개'로 불리우다가 차츰 ‘미래고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미래 마을에는 400년 전에 정착한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 새말[新垈洞] : 작은밤골 입구에 있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 생긴 마을.
  • 옥계역터[玉溪驛址] : 미래 마을에 있던 옥계역의 터로서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중앙 관청의 공문을 지방 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을 공급하던 역참이 있었다. 남쪽은 장단도호부의 백령역에서 서울로, 북쪽은 철원도호부의 용담역(龍潭驛)을 거쳐 함경도 노선으로 이어졌다. 『여지도서』 연천현 역원조에 의하면 백령역· 옥계역·용담역은 고려시대에도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일제 강점 후 철도와 통신의 발달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옥계역이 자리했 던 이 곳 역시 옛 역사(驛舍)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민가만 들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온수골[溫水洞] : 옥녀봉 남쪽 임진강변의 골짜기이자 마을. 예로부터 피부병에 효 험이 있는 온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병 통치의 효력으로 소문이 널리 퍼져 사방에서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들면서 물을 더럽히고 걸식하며 주민들을 괴롭히자,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어떤 도승이 부적을 돌에 싸서 물에 던져 넣자 온수가 끊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연주현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 윗말[上洞] : 관말 서쪽에 있던 마을. 중간말을 기준으로 할 때 위쪽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간말 : 장거리 서쪽, 중간에 있던 마을. 현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지역 설명

  • 광대봉 : 미래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광대가 정상에 있는 두봉우리에 줄을 매고 놀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군수맥이고개 : 작은밤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던 군막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귀골[耳谷洞] : 광대봉 아래에 있는, 사람의 귀처럼 생긴 골짜기.
  • 긴등 : 청화산에서 군자산으로 이어지는 산등.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가 된다.
  • 노루메기고개[獐項] : 장거리 동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서 ‘노루메기'로 불렀다고 전해 오나, 원래의 정확한 뜻은, ‘넓음' 또는 ‘늘어진'의 의미인 ‘너르'와 ‘목'의 모음동화 현상인 ‘메기'가 합쳐져 ‘너르메기'로 불리우던 것이 ‘노루목'으로 점차 굳어지면서 한자로 음차되는 과정에서 ‘노루목'이 된 곳이다. 실제로 이 곳의 지형은 긴등에서 내려온 산 끝자락이 넓게 늘어진 목처럼 되어 있어 노루[獐]와는 무관한 것 임을 알 수 있다.
  • 동지미산 : 매봉 아래에 있는 산. 두꺼비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말가죽대기 : 아전비 남쪽에 있는 밭. 병자호란 당시 청의 군사들이 식량이 떨 어져 말을 잡아 먹었던 곳이라고 한다.
  • 망근도리밭 : 매화봉 동쪽에 있는 망건처럼 생긴 밭.
  • 매봉 : 마정승 묘 뒤에 있는 산. 예전에 이 곳에서 매 사냥을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매화봉(梅花峰) : 관말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 매화꽃 형상이라 한다.
  • 맨두리 : 매화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세 줄기의 산자락. 활짝 핀 매화꽃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백고개[城峴, 百人峴] : 잣골에서 중면 삼곶리의 논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옥녀봉 산성의 밑으로 다니는 고개라 하여 성의 고어인 ‘잣‘에서 뜻을 따와 ‘잣고개'라 하였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잣‘을 ‘잣 백(栢)'으로 오기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이 고개가 높고 험하여 대낮에도 산짐승과 도둑이 많아 백 사람이 모여야 넘어다녔다 하여 ‘백고개'라 부르기도 했다.
  • 사당골[祠堂谷] : 정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연주현에 딸린 사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상상재 : 옥계에서 온수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지형이 높고 가파르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이 고갯마루가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 샘고개 : 옥계리와 연천읍 읍내리 사이에 있는 고개. 샘이 있었다 한다.
  • 선반밭 : 매화봉 북쪽에 있는 선반처럼 생긴 밭.
  • 소리개고개, 솔개미고개 : 투미골 북쪽에 있는 고개. 골짜기 안에 솔개 형국의 명당이 있으나 그 혈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중면 삼곶리와 합수리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 숯돌봉 : 샘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가 된다.
  • 아지봉(阿只峰) : 샘고개 남쪽, 옥계리*선곡리*연천읍 읍내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 열두마지기논 : 정자골 옆에 있는 열두 마지기 넓이의 논.
  • 태봉(胎峰) : 작은밤골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궁실에서 태를 봉했던 곳이었으나, 1926년경에 도굴되어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옥계천(玉溪川) : 연천읍 상리의 재궁동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옥계리 중앙의 긴 개울.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옥녀봉(玉女峰), 배꼽봉, 성산(城山) : 잣골 북쪽에 있는 산. 높이 205m. 중면 삼곶리의 경계가 된다. 삭녕에서 연천 북쪽으로 내려오던 산맥이 연천읍 상리에 있는 솟을봉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좌측으로 내려온 산맥은 남자의 정기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군자산이라 하였고, 우측 산맥의 최고봉인 이 봉우리를 여자로 의인화하여 옥녀봉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또한 이 곳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선녀가 놀았다 하여 ‘옥녀봉'이 되었다고도 하며, 산의 모양이 배꼽과 닮았다 하여 ‘배꼽봉'으로도 불리운다. 이 산은 고려시대 연주현의 진산이 되었고,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 초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이다. 현재 산 정상에는 산성의 유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 인성골[仁聖洞] : 청화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작은밤골 : 매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잣골[城谷] : 중간말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옥녀봉 정상에 있는 산성의 아래에 있다 하여 성의 고어 ‘잣‘에서 음을 빌어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청풍 김씨(淸風金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 장거리(場巨里) : 미래 남쪽에 있는 사거리.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큰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정자골[亭子谷] : 상상재 동쪽, 큰 느티나무 고목이 있던 골짜기. 일제강점기 때 이 곳에 300여 년이나 된 정자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속으로 큰 구렁이가 들어가자 이를 본 마을 청년이 불을 질러 나무가 타 죽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강(康)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 청화산(淸華山) : 인성골 동쪽에 있는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에 있는 산.
  • [鬪美洞] : 매화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관기들이 살던 곳으로 당시 부근에 살던 호색가들이 미색을 탐하여 싸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그 때에는 “ 미색을 취하려면 그리가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