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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 문화유산

정발장군 묘 이미지
정발장군 묘 이미지
정발장군 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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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장군 묘4428
  • 주소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 34-1 일원
  • 문의처 : 연천군청 문화체육과 031-839-2565 / (주말, 근무시간 외) 연천군청 당직실 031-839-2119
  • 묘는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며,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다.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다.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현재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었고,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부대시설
  • 주차장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휠체어 이동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화장실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장애인화장실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수유실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자전거 출입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반려견 입장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 와이파이사용(이용)가능사용(이용)불가

정발장군 묘 소개

위치 및 지형

미산면 백석리에 위치한 경주정씨 제실의 서북쪽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50m 가량의 9부 능선에 동쪽을 향하여 위치한다.

유적 현황

묘는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며,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다.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다.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현재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었고,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묘역입구에는 장군을 따라 순절한 애향과 그녀의 여종인 용월 등의 사적비가 있는데 이는 1982년 양경공사적비와 함께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정발(鄭撥,1553(명종8)~1592(선조25))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이다.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해남 현감 거재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을 차례로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 4월13일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적 1진은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인 부산진으로 쳐들어 왔다. 이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때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로 정발의 지휘하에 실제 병력 1,000명 규모의 군·관·민이 일심으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음날 성이 무너지고 정발장군도 4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부산진 전투가 끝나고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유품(옷과 갓)만 수습하여 의관장을 치렀으며 후에 무공이 알려져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부산의 충열사(안낙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한편 1683년(숙종 9)에 이르러서는 마을 입구에 정려문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 京畿道,『京畿人物誌』下, 1991
  • 漣川文化院, 『鄕土史料集』, 1995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0

문화재 정보

  • 지정별 : 기념물 제51호
  • 지정일 : 1979.09.03
  • 지정면적 : 5,201㎡

위치 및 주변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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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 34-1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