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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 대사비_001(연천군청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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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 대사비_원문_003(연천군지편찬위원회_2000)

제월당 대사비(薺月堂 大師碑)

소재지/소장처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내용
- 찬서전 : 신익성(申翊聖) 찬, 이광(李統)서·전
- 규모 : 총높이 276cm, 비높이 170cm폭, 78cm, 두께 24cm
- 국역 : 유명조선국 허한거사 경헌대사비명병서
우리 동방의 불법은 신가에서 비롯하였으며 고려에 가장 번성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문교가 아름답고 밝아져서 점차 회피하여 물리쳤으나, 종풍은 민몰되지 아니하고, 조파가 서로 전하여 청허당 휴정대사에까지 이르렀다. 휴정대사는 영관에게 법통을 받아 중국 임제의 정총을 계승하였다. 팔방의 비구들이 분주히 청강하였는데, 회상은 항상 수천인에 이르렀다. 오랜 뒤에 그 제자들 중에 수행이 깊고 덕이 충만한 자들은 각자 문파를 나누어 학도들을 받아들였다.
허한은 계율과 선해로써 산문에서 더욱 저명하게 되었으며, 법랍이 가장 오래되었다. 입적할 때에는 많은 영이한 자취를 보였다. 그 문인 도일 ∙ 홍민 ∙ 설암 ∙ 밀운 ∙ 담원 등이 열흘동안 게으름 없이 정성을 다해 기도하여 전후에 얻은 사리주 5립을 보개산 심원사, 금강산 표훈사, 지제산 천관사, 대해산 묘희암에 나누어 두었다가 아울러 석종을 건립하고 이를 안치하였다.
도일 등이 허한의 사행을 기록하여 나에게 명을 청차며 2 ∙ 3차례 왕래하였다. 그러므로 비로소 붓을 잡고 서술하게 되었다.
경헌은 그의 법명이고, 허한거사라 자호하였으며, 그 거처하는 곳을 제월당이라 명명하였다.
속성은 조씨이며 본관은 호남(湖南)이다. 어머니 이씨가 꿈속에서 한 범승을 보고 깨어나 임신하였으며, 가정 갑진년(1544년) 정월 14일에 출생하였다. 골법이 남달리 기이하게 빼어났으며, 성령이 범인과 달라 해제 때부터 불사를 만들어 장난하며 놀았다. 10세에 호시의 상을 당하였고, 15세에 천관산에 들어가 옥주선사를 쫓아 머리를 깎았다. 자사를 두루 섭렵하여 읽어서 고금의 사물의 이치를 통잘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속세의 것이지 속세를 떠나 중이 되는 법은 아니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원철대선을 뵙고, 이어서 현운 ∙ 중덕 을 참례하여 군경을 섭렵하여 다한 수 삼장의 가르침에 널리 통하였다. 또 희열을 종유하여 의심나는 강령을 베어서 끊었다.
만력 병자년(1576년)에 책장하고 서산도량에 이르러 서방에 온 밀지를 듣고 즉석에서 크게 깨달아 막힘이 없었다. 무인년(1578년)에 금강산 내원동으로 들어가 색태내관(정신 상태나 행동을 내면적으로 성찰함)하며 먹는 것도 물리치고, 홀로 앉아 좌선하기를 수 년동안 하여 확연(마음이 넓고 허심탄회한 모양)히 얻은 바가 있었다. 이로부터 찾아와 배우는 자가 있으면 도서절요로써 방향을 결택하게 하고, 선요서장 으로써 이를 참증토록 하여 배우는 자들을 조종하는 것은 스님의 손에 달려있었으며, 변통함은 배우는 자의 근성(사람의 타고난 성질)에 따랐다. 그러므로 입문한 자들은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마음에 가득 채워서 돌아갔다.
임진년(1592년)의 난리에 청허가 승도를 모집하고 창의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선묘께서 선사에게 좌영장을 배수하셨으므로 선사는 잠시 군문에 나아갔다가 곧바로 사의를 표하고 물러났다. 선묘께서 그 절개를 고상히 여기시고, 특별히 판서교양종사로 명하였으나, 사양하며 말하기를 “만리장강수로도 더럽혀진 이름을 씻어서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종적을 감추고 세상에 나타내지 아니하여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계속 운집하게 되자, 선사는 마침내 멀리 은둔하려고 혹은 금강산으로으로, 혹은 오대산으로, 혹은 치악산으로, 혹은 보개산으로 돌아다녔는데, 그 중 풍악을 가장 좋아하여 은선동에 암자를 지어놓고 7년을 머물렀다.
계해년(1623년) 봄에 홀연히 산을 떠나려하자, 이를 만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일절(절은 적구로 시 한수를 말함)을 지어 보여주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강산만 좋게 여겨 있으면 길이 푸르기만 할 뿐 구름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요, 단표를 차고 마땅히 일찍 떠난다면 풍설이 밤에 응당 분분히 흩날릴 것이다.” 석장 (스님들이 짚는 지팡이)을 짚고 오대산으로 옮겼는데, 그 후 선사의 말이 과연 징험이 되었다.
숭정 임신년(1632년)에 치악산으로부터 보개산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이곳은 인연이 있는 산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미감이 있더니, 점차 쇠퇴함을 보였다. 문인들이 게을 남길 것을 강력히 청하므로 응대하기를 “진흙 소가 바다로 들어가니 앞길이 아득하고, 삼생의 일대연을 깨달았거늘, 무슨 일로 다시 번뇌를 생각하겠는가! 재각(제사 지내는 곳)에 와서 진편을 찾음 이로다.”라고 말한 뒤에 홀연히 입적하였으니, 계유년(1633년) 12월 26일이었다. 이날 밤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서 닿았고 삼괄(삼나무와 향나무)이 모두 하얗게 변하였다 관골(화장)하는 날 저었으며, 날아가던 새가 땅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달리는 짐승들도 슬피 울었으므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고 추모하며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내가 예전에 법견 ∙ 성정 ∙ 응상 ∙ 언기 등 여러 선사들과 관동으로 유람할 때에 근세의 노덕한 스님을들 논한 바 있었는데, 모두 헌공으로 종을 삼았다. 남방의 스님인 대능 ∙ 각성 또한 지극히 추복하였으며, 일굴의 공문들이 흠잡을 수 없다고 하였다. 슬프다! 만약 선사 같은 분이 신라나 고려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왕사나 국사의 칭호를 면치 못하여 일시에 과요하였을 것이나. 마침내 우문지세를 만나 황적한 경지에 몸을 피하여 그 도를 이루어 문도로 하여금 의를 암송하여 주창케 하여 쇠하지 않게 하였으니, 일세이 과요한 자와 더불어 그 득실이 또한 변별이 있도다. 명하기를,

속세를 떠났으나 천리에 함치되었으며.
변함없이 수행함은 만고에 항상 빛나리로다.

광덕대부 동양위 신익성이 글을 짓고.
의창군 광이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다.

황명 숭정 9년(인조 14, 1636년)8월 일에 운현이 비를 세우다.

이 비석 돌은 충청도의 홍주에게 캐내어 배에 싣고 왔다. 손으로 옮기는 수고를 하지 않고 노를 사용하여 징파의 강변에 이르러 군도와 승속 오륙백 명을 보집하여 예인하였다. 이에 수의한 사람의 성씨와 돌이 있던 곳과 돌을 예인한 무리 등을 기록하여 후대의 귀령을 삼노나.

본사 삼중창대화주 인숭 정위

정부인 심씨, 이풍가, 김몽철, 문응상, 백이남, 이응춘, 이황운, 이언복, 이용금, ▨▨▨, 차돌렴, 최용억, 김대립, 이천, 최홍, 차씨계옥, 진응현. 김백정산, 박수창, 김희경, 임준무. 여 복상, 이씨정미, 김천경, 정삼길, 정의운, 양연남, 정번기이, 정일견, 이백옥, 이부귀, 임씨우개, 여 신진, 여 계금, 속고리, 여 춘이, 금유, 옥매, 최씨부, ▨덕, 옥진, 차수억, 정석▨, 김충민, 즉음승, 정상민, 강애립, 장말진, 김계▨, 김계▨, 최응진, 신유길, 박효신, 이의길, 김여강, 문명금, 강춘장, 김영, ▨연, 계향.

“우안 ..... 후언”의 153자 마멸이 심해 번역이 불가함.

왕비전하수제년(왕비전하께서는 제년토록 수를 누리시고)
주상전하수만세(주상전하께서는 만세토록 수를 누리시고)
세자저하수천추(세자저하께서는 천년토록 수를 누리소서)

의창군, 능원대군, 상궁최씨, 첨정 김시송, 사과 이천성

상족질
홍민 ∙ 설▨ ∙ ▨▨ ∙ ▨▨ ∙ ▨▨

산중질
학린 ∙ 학정 ∙ 자수 ∙ 계휘 ∙ 의호 ∙ 의심 ∙ ▨▨ ∙ ▨▨ ∙ ▨▨ ∙ ▨▨ ∙ ▨▨ ∙ 석언 ∙ 언의 ∙ 법영 ∙ 은휴 ∙ 천준 ∙ 성헌 ∙ 일주 ∙ 의정 ∙ 혜인 ∙ 천원 ∙ 수감 ∙ ▨▨ ∙ ▨수 ∙ ▨▨ ∙ ▨▨ ∙ ▨▨ ∙ 현식 ∙ 수인 ∙ 경민 ∙ 신엄 ∙ 천준 ∙ 법호 ∙ 덕언 ∙ 희일 ∙ 해잠 ∙ 자순 ∙ 경민 ∙ ▨▨ ∙ ▨▨ ∙ ▨▨ ∙ ▨▨ ∙ ▨▨ ∙ 신선 ∙ 희옥 ∙ 묘상

산중질
혜진 ∙ 영희 ∙ 지월 ∙ 의웅 ∙ 묘정 ∙ 영수 ∙ 법호 ∙ ▨▨ ∙ ▨헤 ∙ ▨▨ ∙ ▨▨ ∙ ▨▨ ∙ ▨▨ ∙ 영준 ∙ 홍▨ ∙ 법호 ∙ 지헌 ∙ 지웅 ∙ 만휘 ∙ 지엄 ∙ 양타 ∙ 담밀 ∙ 종현 ∙ ▨▨ ∙ ▨▨ ∙ ▨▨ ∙ ▨▨ ∙ 문준 ∙ 호 ∙ 희신 ∙ 죽호 ∙ 의천 ∙ 지환 ∙ 처림 ∙ 홍제 ∙ 지영 ∙ 의정 ∙ 처명 ∙ 영철

대시주질
▨▨▨ ∙ ▨▨▨ ∙ ▨▨▨ ∙ ▨▨▨ ∙ 엄동이 ∙ 손이남 ∙ 백영남 ∙ 이인용 ∙ 자근십 ∙ 응덕 ∙ 황대인 ∙ 홍영남 ∙ 김두새 ∙ 여 춘옥 ∙ 장춘정 ∙ ▨▨▨ ∙ ▨▨▨ ∙ ▨▨▨ ∙ ▨▨▨ ∙ 전▨ ∙여 ▨유 ∙ 조정성 ∙ ▨옥 ∙ 최지신 ∙ 전대립 ∙ 장석용 ∙ 조원상 ∙ 강종남 ∙ 장경인 ∙ 박경록 ∙ 정순방 ∙ 김인의 ∙ 박▨남 ∙ ▨개 ∙ 박▨ ∙ 김독경 ∙ ▨법정 ∙ 김일신 ∙ 귀인덕 ∙ 두리 ∙ 가시 ∙ 심금 ∙ 홍씨 ∙ 아내 ∙ 단춘 ∙ 벌기을이 ∙ 업성개 ∙ 김▨▨ ∙ 박▨순 ∙ 조▨진 ∙ 대신 ∙ 김명수 ∙ 덕성금 ∙ 금향 ∙
홍무천 ∙ 지향 ∙ 화가기 ∙ 찰승 ∙ 조천수 ∙ 김성 ∙ 손명길 ∙ 손수길 ∙ 이승일 ∙ 신천길 ∙ 여 춘▨ ∙ ▨▨ ∙ ▨옥 ∙ 박달필 ∙ 윤천용 ∙ 김▨▨ ∙ 이순연 ∙ ▨은 ∙ 이승용 ∙ 여 말개 ∙ 조만주 ∙ 여 애개 ∙ 이희 ∙ 기자문 ∙ 이송죽 ∙ 정애립 ∙ ▨▨ ∙ ▨▨▨ ∙ ▨▨ ∙ ▨▨ ∙ ▨▨ ∙ ▨▨ ∙ ▨▨ ∙ ▨옥 ∙ 함원 ∙ ▨▨ ∙ ▨▨ ∙ 덕생 ∙ 박효원 ∙ 박▨ ∙ 제개 ∙ 옥월 ∙ 옥매 ∙ 이호룡 ∙ 이원기 ∙ 한용 ∙황춘 ∙ 최언 ∙ 박▨룡 ∙ 김언철 ∙ 춘정 ∙ ▨▨ ∙ 묘▨ ∙ ▨혜 ∙ 도본 ∙ ▨점 ∙ 김삼남 ∙ 박희▨ ∙ 김윤걸 ∙ 지중승 ∙ 인절 ∙ 박희태 ∙ 김용천 ∙ 전적돌 ∙ 구화 ∙ 춘씨 ∙ 김두▨▨ ∙ 독정 ∙ 옥화 ∙ 김▨룡 ∙ 단화 ∙ ▨▨ ∙ ▨▨ ∙ ▨▨ ∙ ▨▨ ∙ 생▨ ∙ ▨▨ ∙ ▨▨ ∙ ▨안 ∙ 성진 ∙ 천운 ∙ 천신 ∙ ▨▨ ∙ ▨▨ ∙ ▨▨ ∙ ▨▨ ∙ ▨▨ ∙ ▨▨ ∙ ▨▨ ∙ 설휘 ∙ ▨▨ ∙ ▨▨ ∙ ▨▨ ∙ ▨▨ ∙ ▨▨ ∙ ▨▨ ∙ ▨▨ ∙ 계선 ∙ 계▨ ∙ ▨▨ ∙ ▨▨

탈비겸건별좌
신▨

금강건탑별좌
▨▨

건탑질
본산 설▨, 대해산 담원 ∙ 성준, 천관산 응▨, 성흥산 명의 ∙ 유나 ∙ 교▨

곡양주
대▨, 성▨, 밀▨, ▨▨, ▨▨, ▨해

삼한의 양도읍 사이에 하나의 영산이 있는데 그 산의 이름은 영주이며, 그 절의 이름은 흥림이니, 곧 참으로 지장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진불국이라 이를 만하다. 불법의 흥성은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황공사서들이 신향을 품고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본조(조선)에 이르러 태조의 왕사 묘엄존이란 분이 이곳에서 쉬면서 풀로 옷을 삼고 나무로 먹을 것을 삼아 편안히 자득하기를 수년 동안 하였다. 이에 산의 이름을 보개로 고치고 절의 이름을 심원으로 고침에 선려들이 분분히 번연하여 일국의 명찰이 되었으니, 봉불의 흥성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었다. 임진년의 변란에도 기지(터전)가 유존(전하여 내려와 남음)하여 정인등이 중구할 마음을 내어 얼마 뒤에 보방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선오도하는 자들이 항상 있게 되었으니, 정광이 탑을 건립한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다만 우리 스승이신 제월 스님 만이 여러 산을 유희하며 거처할 곳을 정하지 못하였는데, 이 때에 여러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보개는 옛 성인이 열반했던 곳이니, 나의 후질(쇠하고 졸렬한 자질. 겸사로 쓴다)을 이곳에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인들이 그 말씀을 따라 이곳으로 수레를 돌렸었는데 1년이 지나 돌아가시자, 탑을 건립하고 비를 세워 이 절의 민몰하지 않는 진표로 삼게 되었다.

시자 밀언이 글을 짓고, 아울러 글씨를 쓰다.

황명 숭정 9년(1638년) 세차 병자 8월 일

이 산과 금강산에 탑을 세우고 비를 건립하다. 화주 문인 설현. ▨▨화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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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경헌(敬軒)
사건/단체명/기타
임진왜란
유형분류
기록유산 > 금석문 > 석문
지역분류
신서면
시대분류
조선시대 > 조선시대 후기 - 1636년
주제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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