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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유적은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면적은 778,296㎢이다. 한탄강·임진강 줄기를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하는데, 그 가운데 전곡리유적의 규모가 가장 크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그렉 보웬(Bowen G.)에 의해 전곡리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1979년 최초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그해 10월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68호에 지정되었다. 이후로도 2009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한양대학교 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 의해 총 17차례의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전곡리유적은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과 임진강 지역은 강을 따라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 중 오리산(鴨山)으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의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분포하는 저지를 메웠고,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하였다. 이 현무암 분출은 중부 홍적세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었다. 연대측정 결과, 전곡리의 현무암 2매 중 하부의 것은 약 60만 년 전후, 그리고 상부의 현무암은 30만 년 전후에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곡리유적은 한탄강의 현무암 대지 위에 퇴적층이 쌓이는 동안 지속적으로 짧게 출현한 고인류가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 시에 하천이나 지표상의 물, 그리고 땅속에서 생활하는 벌레와 식물 뿌리 등의 주변 환경 및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는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를 파악할 수 있는 석기 제작소 등의 생활면이 잘 남아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의 특징은 ‘아슐리안형(Acheulean)’ 주먹도끼(hand-axe)이다. 석기에는 양면 또는 단면 가공된 것,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 등이 있다.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 공작과 형태적인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발견 당시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곡리유적 석기 공작의 중요성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곡리유적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들은 1970년대 말까지 유행한 구석기문화를 주먹도끼의 존재를 통해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이분하던 모비우스(H.Movius Jr.)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 공작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불러일으켰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구석기시대의 석기 공작 연구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중부 홍적세 동안 고인류의 생활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Cleaver)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있다.
석기 공작은 전체적으로 보아 아슐리안형 석기 공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석기에 가공이 적고, 형태적으로 정형성이 비교적 높지 않았으며, 즉석에서 만들어진 석기 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 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추정된다.
석기는 대체로 한탄강이나 임진강변에 흔히 있는 석영 맥암이나 규암 등의 냇돌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부 다른 종류의 석재들, 즉 이 지역에서 흔한 현무암, 편마암 등도 소량 확인되고 있다. 석기 중 대형 석기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류, 즉 타원형 또는 첨두형의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대형첨두기, 찍개류, 대형의 긁개 그리고 다각면원구 등이 있다. 소형 석기로는 두드러지는 것은 없고, 대체로 몇 차례의 타격으로 사용할 부분을 가공하는 방식이며, 뚜렷하게 날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긁개날, 톱니날, 홈날 등을 제작한 흔적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박편이나 부정형의 석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석핵을 이용하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박편은 대체로 횡장박편이 많은데 측면이 불규칙한 것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석핵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당히 박리가 진행된 것들이 확인되었다. 초기 단계의 것들로는 몇 편의 박리흔이 남아 있는 냇돌이나 부정형의 대형 석재들이 있고 상당히 지속적으로 박리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산알 모양을 닮은 유사 원추형의 석핵도 있다. 이것은 크기도 작아 상당히 발전된 박리 기술로 추정된다. 또한 상부층에서 작은 석기들이 발견되어 박편 제작 기술상의 변화를 토층의 깊이에 따라 상정해 볼 수 있지만 기술상의 뚜렷한 변화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곡리 석기 공작의 중요성은 이 유적의 층위 보존이 대단히 잘되어 있다는 점이며, 형성 과정을 잘 보여주는 층위 속에서 이러한 아슐리안형 석기를 포함한 석기 공작이 인간의 행위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된 상황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도 이 전곡리 구석기 공작이 동아시아 지역에 나타나는 주먹도끼 공작의 기능성과 다른 석기 공작과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임을 보여준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유적의 구조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적의 규모는 당시 고인류의 생활을 복원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장점이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서 유례가 드문 경우이다.
따라서 전곡리유적은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구석기시대의 석기 공작 연구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중부 홍적세 동안 고인류의 생활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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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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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박물관, 2001, 『경기문화유적지도』 Vol. 3, p.198
-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 3 문화유적(2), pp188~189
-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경기도편)』, p.462
- 배기동·고재원, 1992, 『전곡리구석기유적발굴조사보고서』,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경기도연천군
- 서울대학교박물관, 1983, 『全谷里 遺跡發掘調査綜合報告書』, 연천군·서울대학교박물관
- 연천군·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pp.273~277
- 연천군지편찬위원회, 2000, 『漣川郡誌』 上, pp.440~444
-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7, 『文化遺蹟分布地圖 - 漣川郡- 』, pp.205~206
- 전곡선사박물관 (https://jgpm.ggcf.kr/)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검색어 : 연천 전곡리유적(http://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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